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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집스탭이야기 #3_멈춰섬의 미학_이용찬 팀장


(이용찬 팀장은 무료 급식에 필요한 제반 사항과 후원자, 봉사자를 관리하는 관리지원팀장입니다. 4년차를 맞이해 바하밥집의 복리후생 제도인 피정을 보내고 왔습니다. 그가 없는 사이 모두가 그를 그리워하며 제주에서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는 후문입니다. 박기남 실장이 제일...)

멈춰섬의 미학

이용찬 관리지원팀장

누구에게나 꿈이 있을 겁니다. 아니, '꿈'이라는 거창한 이름 말고, 삶의 울타리 바깥 어딘가에 있는 그것을 한 번쯤은 울타리 안으로 살포시 가져다 놓고 싶은 어떤 소망들 정도는 있을 테죠. 저에게는 ‘제주 한 달 살기’가 그 목록 중 하나였습니다. 일의 족쇄(?)에 묶인 수백만 월급쟁이에겐 한 달 휴가란 마치, 아무도 없는 용산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무제한 팝콘통을 옆구리에 끼고 어벤져스 인피니티워를 관람한다든지, 제 개인 sns에 꾸준히 올리고 있는 음악 관련 게시글에 박지윤님(저의 최애 뮤지션입니다..)이 '항상 잘 보고 있어요' 댓글을 달아준다든지, 이런 허무맹랑한 것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긴 했지만요.

“쉬는 것도 사역이다.”

하지만 간절히 소망하면 우주의 기운이 정말로 도와주는 걸까요. 3년 동안의 바하밥집 사역을 지내고 이제 4년차로 접어든 저에게 대표님은 무려 한 달의 휴가를 허락해주신 겁니다. 바하밥집 같이 작고 유연성 있는 단체이기에 가능한 직원 복리후생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소규모 단체에서 한 사람의 빈자리는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과연 정말 한 달을 꼬박 쉴 수 있을까 하는 마음 속 의구심은 휴가를 사용하기로 한 4월이 되기까지 걷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쉬는 것도 사역이다.”라는 대표님의 철학은 끝내 견고했고, 저는 못 이기는 척 한 달 동안의 업무를 남겨진 동료들에게 재빨리 떠넘기고, 통장 잔고를 다 털어 지난 4월, 제주도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얼른 서울을 떠버리자.)

“떠나자, 제주로!”

사실 마냥 쉬기만을 위한 휴가는 아니었습니다. 바하밥집에서의 3년 간 사역을 돌아보고 자평해보는 시간이 되어야 했고,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명상을 하면서(기독교 문화에서는 ‘기도’ 혹은 ‘묵상’ 이라고도 하지요.) 제 개인적인 내면 역시 돌아보고 다시 새롭게 세우는 시간을 갖기도 했어야 했습니다. 숙제처럼 주어진, 읽어야 할 책도 한 묶음이었고요. 그렇게 제주에서 시간을 보내고 한 달 뒤 다시 서울로 돌아와 김포공항을 나설 때에는 제 뒤로 후광이 비쳐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망상이 들 정도로 꽤나 비장한 각오로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주는 그렇게만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나 낭만적이었고, 햇살은 따듯했고, 바람은 더 없이 시원했으며, 숙제는 늘 귀찮고...


(한 달 뒤 김포공항에 이런 모습으로 도착해 있을 줄 알았다.)

결국 제주에서의 한 달 동안 그냥 정말 잘 쉬고 잘 자고 잘 먹다가 왔습니다. 헤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나 봤던 아담한 백록담도 직접 눈에 담아 왔고, 거짓말처럼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 왔고요. 거의 매끼를 식당이나 패스트푸드, 편의점을 순회하며 사먹던 서울 생활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노동의 의미를 담아 집에서 의무적으로 매일 하루 한 끼 만들어 먹으며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직접 차린 밥에 대한 애착도 생겨서 오고 말이죠.(거창한 의미를 담았지만 그냥 돈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소소한 추억들을 듬뿍 누리던 시간이었는데, 그 중의 백미는 아무래도 숙소에서 바라보았던 조용한 제주의 마을과 그 너머 보이는 바다였던 것 같습니다. 2층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시선의 끝에선 파도소리가 퍼지고, 이따금 이름 모를 새소리가 들리고. 잠시 졸았다가 다시 눈을 떠도 푸른 바다는 여태 가만히 머물러 있던 그 시간들. 그 풍경을, 그 소리를 제 마음 구석구석까지 가득 담기에 한 달이라는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숙소에서 바라봤던 창 밖 풍경. 새소리와 파도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멈춰섬의 미학”

저는 후광을 얻어 서울로 돌아왔을까요? 거울을 들여다봐도 눈이 부시지 않은 것 보면 아무래도 그렇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제주에서 돌아온 지 25일째인데, 여전히 별 것 아닌 일에 짜증나고, 여전히 출근하면 빨리 퇴근해서 집에 가고 싶고, 여전히 제가 걷고 있는 방향성에 대한 물음에서 헤매고 있는 저의 모습만 거울에 비칠 뿐입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뭐가 됐든지 간에 답을 얻고 싶은 조바심이 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뭔가 의미가 있는 것들을 제 속에 가득 담아서 오고 싶기도 했고, 괄목할만한 스스로의 변화를 기대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한 달의 시간은 오히려 제 속에 있던 것들을 비우고 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제주가 주는 넉넉함과 한 달의 시간이 주는 여유로움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명명할 순 없지만 제 안에 있던 찌끼들을 버리기엔 충분히 넉넉했고 충분히 여유로웠습니다. 아마 백록담에 한 보따리 버리고 온 것 같고, 유채꽃밭에도 한 보따리 버렸고, 제주 바다에는 열 보따리 정도는 버리고 온 것 같습니다. 바삐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서는 것의 미학은 여기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무언가를 얻는 것은 달리고 있는 일상 속에서 충분했습니다. 잠시 멈춰 서는 이유는 그간의 먼지를 털어내기 위함일 뿐이죠.


(오름들에도 몇 보따리씩 놓고 왔던 것 같다.)

다시 일상입니다. 일상으로 돌아온 저는 이제 다시 제 안에 많은 것들을 쌓으려 할 겁니다. 또 많은 물음들을 저에게 던질 것이고요. 하지만 그 한 켠에서 일렁이고 있는 제주 바다는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이 쌓여 위태위태한 것들은 그 바다 속에 던져 넣어 버릴 생각입니다. 그래도 될 정도로 꼬박 한 달 동안 제 안에 담은 제주의 바다는 넉넉하게 파도치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또 때가 되면 멈추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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